송광사로 가는 아름다운 곡선 길에서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든 이길을 걸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.
죽은 고목나무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소망을 기원하는 돌맹이를 올려 놓았다.
저 멀리 송광사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고
송광사 입구의 작은 집 두채 어떤 용도의 집인지는 모른다.
송광사 경내의 아름다운 건축물은 물 속에서 그대로 나타난다.
일반인 출입금지 이곳은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이라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시켜 놓은 곳이다.
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이라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들어가서 카메라 셔타를 눌러 본다.
일반인 출입금지 내에서 본 바깥의 풍경도 아름답다.
아름다운 색채가 어우러진 대웅전도 멋지다.
날이 안 좋아서 파란 하늘을 카메라에 담기 힘들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.
날이 안 좋아서 파란 하늘을 카메라에 담기 힘들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.
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.
송광(松廣)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.
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.
곧 '송(松)'은 '十八(木)+公'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, '광(廣)'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.
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.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.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(솔개가 내려앉은 대)라 불렀다한다.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(솔개의 사투리)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.
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(솔갱이)가 많아 '솔메'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.
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(慧璘)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.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(吉祥寺)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,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.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(釋照)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.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.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(명종 27년1197년 ~ 희종 원년)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.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. 그 동안 정유재란, 6.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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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09년 11월 19일 전라남도 송광사에서 석훈이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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